식민지시대 105일 단식투쟁 끝에 옥사한 ‘이한빈’

  • 박준성의 역사이야기
  • 글쓴이: 박준성
  • 2013-03-27
105일
단식투쟁 끝에 옥사한 ‘이한빈’

끊어진 듯한 과거를 현실과 이어주는 것이 역사가 할 몫이고, 그 힘은 현실의 운동에서 나온다. 일제
식민지시기에 치열하게 싸우다 옥사한 이한빈은 해방 공간에서 전평위원장 허성택에 의해서 다시 살아났다. 그리고 어찌하다 내 눈길에 들어와 몇 차례
짧은 글을 쓰게 되었다.

이한빈에 대해 쓸 때마다 내용이 조금씩 덧붙여지기도 하고 강조점이 달라졌다. 자료가 보충되거나 현실에
대한 내 감정 상태에 따라 그에 대한 인식도 변하기 때문이다.

1989년
5월 1일 메이데이 100년(100주년은 1990년)을 앞두고 구로역사연구소(현 역사학연구소)에서 회보 특집으로 메이데이 문제를 다루었다.
자료를 찾으려고 해방공간에서 나온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 기관지 <전국노동자신문> 살펴보았다. 어렵게 구한 전국노동자신문
복사본을 읽어 나가는데 한 기사가 눈에 확 들어왔다. 전평 위원장 허성택의 연설문이었다. 1946년 5월 1일 메이데이 기념행사에서 연설할
'메-데-에 제하야 노동자 동무들에게'라는 기념사를 앞당겨 실은 4월 26일자 기사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이한0 동지'를 소개한 부분은 몇
번이고 읽고 또 읽었다. 한자를 섞어 쓴 글을 읽기 편하게 고쳐 보았다.

우리들은 60주년 메이데이를 오늘 처음으로
전국적으로 맞게 된 것은 연합국의 덕택과 반일 민족 혁명가들의 거룩한 희생의 선물에서 얻은 것이라는 것을 한 사람이라도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함남북에서 노동운동하든 혁명자들이 망명을 하면서 또는 땅굴 생활과 삼림 생활을 하면서 일제 경찰의 총칼을 방어하기 위하여
몽둥이와 칼을 유일한 무기로 하고 용감하게 싸운 것입니다.
특히 여러분에게 소개하려는 것은 함남 신흥 출생 이한0(李翰0) 동지는
1929년 신흥 탄광 습격 사건으로 망명하다가 1936년 검거되어 5년 형을 마치고 강도 일제가 만들어 놓은 정치 예방 구금소에 구금됨으로부터
'정치 운동자를 내 놓으라' '예방구금소를 철폐하라' '야만적 박해와 비인간적 취급을 하지 말라'는 등 7개 요구를 들고 두 번 단식 투쟁에
적지 않은 승리를 하였으나 놈들은 제일로 미운 그를 죽이기로 결정하고 그에게 온갖 모략, 위협, 무고와 테러를 하였기 때문에 분을 이기지 못하여
1943년 3월 1일에 단식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놈들은 단식한지 20여일 후에도 만세일계(萬世一系)의 황국 일본에 반역자임으로 죽이라고
말로서 다할 수 없는 능욕을 가하였습니다. 그는 단식한지 백오 일 만인 6월 13일에 39세를 최기(最期)로 영원히 세상을 떠났습니다. 뼈만
남었든 그는 죽기 삼일 전에 나에게 부탁하기를, 나는 더 살 수 없으니 나의 뒷일을 동무들이 계승하여 조선 독립을 완성하기를 바라며 만일 동무가
살아 나가거든 동무들에게 일제가 이같이 나를 죽인 것을 전하여 달라고 하는 부탁을 받고 기회를 얻지 못하여 여러분에게 알려 드리지 못하고 오늘
이 기회에 소개합니다.
그는 적과 가장 선두에서 용감하게 싸우다가 비참하게도 장렬한 전사를 하였습니다.여러분! 우리들의 선배들은 생명을
아끼지 않고 이와 같이 싸웠습니다. 우리들은 선배들의 위대하고 장렬한 투쟁을 본받아 이 기념을 통하여 더욱 굳게 단결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이 자료를 보면서 먼저 떠오른 생각은 '백오 일 동안이나 먹지 않고 목숨을 지탱할 수 있을까?'하는 호기심어린 의문이었다.
어쩌다 한 2-3일 안 먹는 것도 여간 고통이 아니었는데 105일을 무슨 생각을 하면서 버텼을까? 그 힘과 의지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이는
역사속의 수많은 혁명운동가들과 오늘도 끈질기게 버티면서 싸우고 있는 장기투쟁 사업장의 노동자들에게도 던지고 싶은 질문이다.


하나는 ‘이한0’의 온 이름이 무엇일까 하는 궁금함이었다. 복사본으로는 '李翰' 다음에 이름 한 글자가 보이질 않았다. 그 뒤 영인본으로 나온
<전국노동자신문>에도 이름에 한 글자가 안보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전평 위원장 허성택이 소개한 까닭에 '이한0 동지'는 이름 가운데 두
자는 알 수 있지만, 보이지 않는 이름 한 글자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기록된 역사의 뒤편에는 얼마나 숱한 노동해방
민족해방의 전사들이 이름을 남기지 못하고 000으로 숨겨져 있을까. 내가 하고 있는 역사 공부가 “계급‘, ’민중‘, ’대중‘, ’집단‘
이름으로 오히려 개인들을 배제시키고 있던 것은 아닐까? ’개인‘을 발견하지 못한채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체‘가 가능할까?

이한0
동지가 일제의 감옥과 정치예방구금소에 갖혀서도 일제에 맞서 처절하게 싸우는 동안 동시대를 살면서 타협과 변절과 친일 민족 반역의 길을 걸어갔던
'친일파'들의 삶과 그들에 대한 기록은 어떠한가? 다양한 방식으로 친일의 길을 걸었던 자들이 스스로를 '민족지도자'인 것처럼 치장하여 두툼하고
화려하게 남긴 기록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들은 글을 쓸 시간과 돈과 자료를 가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글 쓰는 고통을 스스로 지지 않아도 된다.
주위를 에워싼 '지식인'들을 고용하여 '고상하고 아름답게' 자서전과 회고록을 남긴다. 숨기고 싶은 부분은 빼버리고, 빼버리기엔 미련이 남으나
그래도 껄끄러운 부분은 교묘한 변명으로 분장을 한다.

이들과 견주어 노동운동.민중운동.변혁운동의 지도자들이나 참여했던 대중의 사정은
사뭇 다르다. 그들은 자신의 행위를 기록할 글을 배우지 못한 경우가 많았으며, 글을 알더라도 기록할 틈이 없었다. 무엇을 기록했다 하더라도
제대로 갈무리해 두기도 힘들었다. 그 기록이 빌미가 되어 자신만이 아니라 조직과 동지에게까지 탄압이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때로 탄압하는
사람들이 남긴 기록 속에 그들의 삶의 흔적이 남아 있기도 하지만, 자신과 주위의 일을 사실대로 낱낱이 말한 것이 아니므로 사실 가운데 일부만을
반영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식민지 시대 예로 보면 노동운동 변혁운동에 참여했던 주체들에 대한 기록은 충분하지 못하다.

‘이한0 동지’가 1929년부터 1936년까지 7년 동안 망명생활, 5년 동안 감옥생활, 그 뒤의 예방 구금소 생활, 그리고
죽음에 이르는 단식. 그를 이렇게 버텨나갈 수 있게 한 힘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허성택이 소개한 것을 보면 조선의 독립과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이었을 것이다, 그가 무엇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더 이상 자세하게는 알 도리가 없다. 하지만 생각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어진 시대 상황 속의
그의 삶과 실천이다.

그렇게 ‘이한0 동지’를 이름 한 자 모른 채 부르고 다녔다. 그러던 중 전평을 연구하는 역사학연구소의 안태정
선배가 <해방일보>에 같은 기사가 실려 있다고 복사를 해주었다. <전국노동자신문>에 비어 있던 ‘이한0’의 0자리 글자가
'빈(彬)'이었다. 이한빈(李翰彬)! 온 이름을 알게 됐다는 사실에 가슴이 뿌듯했다. 이제는 강의를 할 때도 이한0 동지라고 소개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한빈’ 한 사람 이름을 찾은 것이지만 모순 된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치열하고 처절하게 온 몸으로 역사의 물길을 바로 잡으려 했던
숱한 이름 없는 전사들을 찾게 된 듯이 기뻤다.

이한빈이 망명생활을 하는 동안 1932년 11월부터 1933년 9월까지 10개월
동안 러시아에 있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공부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은 극동지방에 사는 러시아인, 아시아인들을 대상으로
혁명운동의 지도자를 양성할 목적으로 설치한 기관이었다. 이 시기에 그는 사회주의 사상을 체계적으로 배우고 활동가로 자신을 단련 하였을 것이다.

그 뒤 규장각 도서관에서 자료 복사 신청을 해놓고 책꽂이에서 이런저런 자료들을 뒤적이던 중에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나온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을 보게 되었다. 일제 식민지 시대 검거 투옥되었던 인사들의 신상기록 카드를 모아 출판한 자료집이었다. 내가
특별히 관심을 기울인 인물부터 찾아보았다. 아, ‘별집 7’ 책에 사진까지 붙어 있는 이한빈의 신상기록 카드가 실려 있지 않은가. 사진을 보는
순간 가슴 뭉클하고 눈시울 찡한 감정을 느낄 짬도 없이 눈물이 주루룩 흘렀다. 볼을 타고 흐르는 느낌에 제어할 수 없이 흐르는 눈물을 알았다.

맞다. 본적이 함남 신흥이고, 1905년 생이니까 단식 투쟁 끝에 목숨을 잃은 1943년이 우리 나이로 39살이다. 허성택은 신흥
탄광 습격 사건을 1929년이라고 했는데, 16년전 일이라 연도를 잘못 기억한 모양이다. 1930년 6월에 함남 신흥 탄광 노동자 1백50여명이
탄광시설을 파괴한 사건을 말하는 것 같다. 신흥탄광습격 사건 뒤 러시아에 망명할 때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을 다녔고 국내에 들어와 활동을 하던 중
허성택의 소개에 따르면 1936년에 검거되었다.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을 보면 검거된 뒤 이한빈은 1938년 2월 경성 복심에서
치안유지법위반으로 5년형을 언도받고 1942년 9월 출소하였다. 출소한 뒤 바로 정치예방구금소에 갇힌 것으로 보인다.

치안유지법은
일본에서 사회주의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만들었으나 1925년부터 식민지 조선에 적용하여 사회주의운동을 포함한 민족해방운동을 탄압하던 악법이었다.
정치예방구금소는 일제가 1941년에 '조선사상범 예방구금령'을 제정하여 전향하지 않은 사상범을 검거하여 격리 수용한 서대문구치소 안의
강제수용소였다. 해방이 되었을 때 예방구금소에서 풀려난 사람들은 끝까지 전향하지 않고 비타협으로 투쟁하던
사회주의자․민족해방운동가들이었다.

이한빈은 단식 투쟁을 하다가 예방구금소에서 목숨을 잃었기 때문에 살아서 해방을 맞이하지 못했지만,
식민지 지배하에서도 이런 ‘선배’들이 있었기 때문에 해방후 50~60만명의 조합원이 가입한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를 만들 수 있었다.
1990년 전노협을 만들 때 전평은 디딤돌이었고 기댈 기둥이었다.

전평 위원장 허성택의 표현을 빌면 우리들의 선배들이 생명을
아끼지 않고 이와 같이 싸웠기 때문에 오늘의 노동운동이 그나마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역사의 거울에 오늘의 노동운동을 비춰보면서 ‘어떻게
싸워온 노동운동인데....’하며 한숨만 쉬고 있을 수 없는 까닭은 바로 지금 여기의 우리가 우리의 후배들이, 우리의 아이들이 돌아볼 역사를
만들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