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들 수 없는 남도 - 제주 4.3항쟁

  • 박준성의 역사이야기
  • 글쓴이: 박준성
  • 2013-04-03


잠 들 수 없는 남도 - 제주 4.3항쟁

1948년 제주 4.3항쟁이 일어난 뒤 65년이 되었다.
제주 4.3항쟁 역사 유적지 가운데 꼭 가볼 만한 곳으로 내가 손꼽는 곳이 ‘동광큰넓궤’이다. (동광큰넓궤가 바로 영화 ‘지슬’의 중심 무대이다). 안덕면 동광마을에서 서북쪽으로 2.5키로 쯤 떨어진 곳에 있는 천연동굴이다. 1996년 8월 동아대 학생들과 제주 역사기행을 하면서 처음으로 동광큰넓궤를 끝까지 들어가 보...았다. 굴 입구가 좁아서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갈 수 있었다. 몸을 바짝 낮추고 엉금엉금 기면서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10여 미터 들어가자 2-3미터 쯤 되는 절벽이 나왔다. 턱걸이하듯 가까스로 내려갔다.

큰 방만한 공간 안 쪽으로 돌을 쌓아 턱을 만든 방호벽이 있었다. 그 안쪽 옆으로 깨진 항아리 조각들이 흐트러져 있다. 굴이 급하게 좁아졌다. 오리걸음으로 걷다가 땅바닥에 배가 닿을 정도로 엎드려 기어야 했다. 후래쉬를 준비하지 못해 라이타를 켰다 껐다 하면서 앞장섰다. 다행히 군데군데 불을 켰던 초 동가리가 남아 있어 불을 붙였다.

바닥이 울퉁불퉁해서 낮은 포복으로 길 수도 없었다. 머리 위 바위는 용암이 흘러내려 뾰족뾰족했다. 조금만 일어서도 머리와 등이 긁혔다. 팔굽혀 펴기 자세로 엎드려 양팔로 몸을 끌어당기면서 나가야 했다.

얼마큼 들어가야 허리를 펼 수 있을까, 이렇게 들어갔다 몸을 돌려나올 수는 있을까. 좁은 굴과 어둠이 무서워 진땀이 배어나왔다. 얼마나 라이타를 켜댔던지 손가락이 노랗게 탔다. 그렇게 이삼백 미터는 긴 것 같았다. 나중에 몇 차례 더 가보았더니 엎드려 기어야할 거리는 20여 미터도 채 안되었다. 한참을 기다가 쪼그리고 앉을 만큼 굴이 넓어지니까 살 것 같았다. 굴 끝자락에 ‘광장’ 같은 넓은 공간이 있고, 굴에서 다시 굴이 뻗어나간 가지 굴도 있다.

모든 불을 껐다. 터럭만한 빛도 새어 들어오지 않았다. 모든 색이 소멸된 듯한 어둠이었다. 옆 사람 숨소리 바스락거리는 소리까지도 어둠이 흡수해 버리는 듯했다. 옆 사람들 손을 잡다. 어둠이 가로 막았던 고립감이 사라지며 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런 곳에서 주민 120여명이 4.3항쟁을 진압하던 토벌대의 학살을 피해 50-60일 동안 숨어 살았다. 1948년 12월 중순쯤 토벌대가 동광큰넓궤를 발견하였다. 주민들은 더 이상 굴에 머물 수가 없었다. 다시 살길을 찾아 15키로 쯤 떨어진 한라산 자락 영실 근처 볼래오름으로 숨었다. 토벌대가 추격해왔다. 끌려간 주민들은 그해 12월, 제주도에서도 아름답기로 이름난 정방폭포 위쪽에서 학살당했다. 왜 동광큰넓게까지 가서 숨어 지내다 모조리 학살당했을까?

1945년 8월 15일 ‘해방’으로 일제의 식민지 지배는 끝났지만 친일파를 처단하고, 식민지 질서를 깨끗이 청소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야 할 시대의 과제가 앞에 놓여 있었다. 김순남이 작곡한 ‘해방의 노래’ 2절은 해방공간에서 노동자 농민들이 바로 착수해야할 사업이 무엇인가를 알려준다.

노동자와 농민들은 힘을 다하야 / 놈들에게 빼앗겼든 토지와 공장 / 정의의 손으로 탈환하여라 / 제놈들의 힘이야 그 무엇이랴

일제 식민지 지배하에서 노동자 농민들이 피 땀으로 일구어낸 토지와 공장은 새로운 사회의 물적 기반이었다. 힘 있는 개인들이 나눠가질 재산이 아니었다. 그런 기반을 바탕으로 해방공간에 살던 사람들은 어떤 사회를 꿈꾸었을까? 그때의 분위기를 살 필 수 있는 자료가 1946년 9월 10일 미군정 공보부에서 8천여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미래의 한국통치구조에 관한 여론조사’였다. 결과를 보면 사회주의 70%, 공산주의 10%, 자본주의 13%, 모름이 7%였다. 해방된지 1년이 지나 ‘해방’의 열망이 좌절을 겪는 상황이었으나, 조사 결과 아직도 80%는 ‘사회주의’‘공산주의’를 지향하고 있었다. 그런 사회가 어떤 사회였는지는 연구해야할 대상이지만 자본주의는 13% 밖에 지지받지 못했다.

해방공간에서 또 다른 중요한 과제는 임시로 그어진 38선을 지우고, 분단이 아니라 통일된 세상을 만드는 일이었다. 그러나 정세는 거꾸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조선 인민에게 고함’이라는 맥아더 포고대로 38선 이남을 점령하여 점령정책을 편 미군정은 노동자 농민들의 요구를 가로막고 38선 이남을 미국의 이해가 관철되는 대소전진기지로 삼으려고 하였다.

1948년 2월 26일 미국이 주도하던 유엔 소총회는 5월 10일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결정했다. 이승만과 한민당을 중심으로 하는 우익세력은 단독선거와 단독정부 수립을 적극 찬성했다. 분단으로 치닫는 위기상황에서 노동자들은 ‘2.7투쟁’으로 맞섰고 제주 민중은 ‘4.3항쟁’으로 저항했다. 1948년 4월 3일 새벽 1시를 앞뒤로 한라산 오름마다 봉화가 붉게 타오르면서 무장항쟁이 시작되었다.

제주 4.3항쟁은 단선단정 반대와 통일독립 완전한 민족해방, 미군정의 학살만행에 대한 저항이었다. 4.3항쟁으로 5.10선거에서 제주도에서는 3개 선거구 가운데 두 선거구 선거가 무효가 되었다. 남제주군 선거구만 가까스로 선거를 치룰 수 있었다. 제주도는 5.10선거를 거부한 유일한 곳이 되었다. 선거가 끝나자 미군정과 단정 세력이 앞세운 군경토벌대의 대대적인 탄압이 몰아쳤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뒤 초토화 작전은 더욱 거세졌다.

미군정의 군사보고서에도 무장한 유격대가 5백명, 적극적인 동조자가 1천명이라고 했는데, 진압과정에서 무자비한 학살이 이어져 제주도 27만여명 주민들 가운데 최소 9분의 1이나 되는 3만여 명 이상이 죽어갔다. 중산간 마을 95% 이상이 불에 타 사라졌다.

학살의 지령자들과 토벌대는 유격대와 주민들을 ‘빨갱이’라고 이름 붙여 자신들의 학살을 정당화하였다. 그들에게 빨갱이는 사람이 아니라 사냥의 대상과 같았다. 실제 그들은 토벌을 ‘빨갱이 사냥(레드 헌트)’이라고 불렀다. 그들도 사람이었다면 짧은 시간에 이토록 많은 사람들을 죽일 수는 없었다. 어떤 살아 있는 생명체도 그렇게 죽여서는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오래동안 ‘국사’ 교과서에는 제주 ‘4.3항쟁’을 북한 공산당의 사주를 받은 공산주의자들이 5.10 총선을 교란시키려고 일으킨 무장폭동이라고 썼다. 그러한 ‘공식’에 맞서 수많은 사람들이 치열하고 끈질기게 4.3의 진실을 밝히려 애를 썼다. 1999년 12월 26일 ‘제주4ㆍ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이 통과되었다.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은 국가권력에 의해 대규모 희생이 일어났음을 인정하고 제주도민에게 공식 사과를 하였다.

하지만 아직도 ‘제주 4.3’의 진실이 다 밝혀지지 않았고, ‘국가폭력’을 제대로 기억하지도 못하고 있는데, 기억 속에서는 희미해져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루의 기념과 행사가 오히려 망각을 촉진시키는 것은 아닐까.

단선을 획책하고, 제주 민중을 학살하고, 역사를 왜곡했던 세력의 후예들이 이제는 해군기지를 짓는다고 제주 강정마을을 파괴하고 있다. 처절하게 폭파된 구럼비 바위 터에 세워질 해군기지는 해방 후의 대소전진기지가 아니라 대중 전진기지가 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자연 파괴에서 나아가 평화까지 위협 받게 된다. 4.3항쟁을 기억하자고 만든 ‘잠들지 않는 남도’가 지금은 해군기지 건설로 파괴되는 강정마을 구럼비 바위를 추모하는 노래처럼 들린다.

외로운 대지의 깃발 흩날리는 이녘의 땅
어둠 살 뚫고 피어난 비에 젖은 유채꽃이여
검붉은 저녁 햇살에 꽃 잎 시들었어도
살 흐르는 세월에 그 향기 더욱 진하리
아 아 반역의 세월이여 아 통곡의 세월이여
아 잠들지 않는 남도 한라산이여

광주 망월동 신 묘역 한 쪽에 5.18민중항쟁을 기리는 사진 전시관이 있었다. 지금은 어린이 역사체험관으로 바뀌어 없어졌지만, 벽에 ‘진실을 말하지 않고 과거를 기억하지 못한 역사는 되풀이 된다’는 경고의 글귀가 쓰여 있었다. 역사가 왜 필요한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역사는 시간이 지나간 뒤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하며 후회하는 방관자가 되지 말고 직접 행동하는 주체가 되라고 가르쳐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