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영화로 보는 세계운동사) 서프라짓(2015): 전투적 여성선거권 운동의 초상

  • 글쓴이: 원영수 (국제포럼 운영위원, 노동자교육센터 운영위원)
  • 2018-03-26

 말이 아니라 행동! (Deeds Not Words!)

 이것은 여성선거권 운동의 전투적 조직인 여성정치사회연합의 슬로건이다. 20세기 초반 영국의 여성활동가들은 남성과 동등한 선거권을 요구하면서, 거리에서 돌로 유리창을 깨뜨리고 우체통을 불태우고 밤중에 저택과 교회를 방화했다. 폭력과 그로 인한 체포를 불사한 서프라젯은 체포되면 정치범 대우를 요구하면서 단식투쟁에 돌입했다. 요즘말로 테러리즘을 투쟁의 전술로 채택한 극단주의 조직의 극단적 투쟁이었다.

 이 전투적 여성운동을 정면으로 다룬 영화가 <서프라짓>(2015, 새러 개브런 감독)이다. 영화는 세탁공장에서 일하는 여성노동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전투적 여성선거권 운동의 역사를 담담히 묘사한다. 운동과 정치를 주제로 다룬 극영화로서 드물게 탄탄한 줄거리를 갖춰 대중성과 예술성을 겸비한 정치영화로서도 성공을 거두었다.

 

 서프라젯: 영화 줄거리

 때는 1912년, 주인공 모드 워츠는 24세 세탁노동자. 남편 소니와 아들 조지와 함께 산다. 어느날 세탁물을 배달하던 도중 서프라젯의 시위를 목격한다. 그 시위대에는 동료인 바이올렛 밀러도 있다.

 국회의원의 부인인 앨리스 호튼은 세탁 여성노동자들에게 국회 증언을 요청하고, 바이올렛이 증언할 예정이었지만 남편에서 구타당해 얼떨결에 모드가 증언을 하게 된다. 감동적 증언이지만 여성투표권에 관한 표결은 진행되지 않는다. 항의시위가 벌어지고, 모드는 체포되어 1주일형을 받는다. 감옥에서 모드는 에멀린 팽크허스트의 측근인 에밀리 데이비슨을 만나다.

 감옥에서 나온 모드는 이웃과 현장 동료들에게 따돌림을 당한다. 남편 소니에게 시위를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지만, 팽크허스트의 연설을 듣기 위해 비밀 집회에 참석하고 팽크허스트와 짧은 대화를 나눈다. 다시 체포되고, 집은 경찰의 습격을 받는다. 이번에는 남편이 모드를 쫓아낸다. 모드는 아들을 보려고 애쓰면서 일을 계속한다. 그러나 사진과 함께 서프라젯이라고 신문에 실리면서 모든 게 끝난다.

 세탁공장에서 어린 여성들을 상습적으로 성추행하는 조장의 손에 화상을 입히면서 직장에서 해고된다. 경찰에게 체포되지만, 스티드 경감은 그녀를 풀어주면서 정보원이 될 것을 제안한다. 모드는 거부한다.

 남편 소니는 모드가 아들 조지를 만나지 못하게 하고, 모드는 더욱 급진적 활동에 빠져든다. 남편이 조지를 입양보내려는 것을 알게 된 모드는 절망한다. 이후 모드는 우편함을 태우고 전선을 자르는 사보타지 행동에 가담한다. 국회의 빈 관사를 폭파한 다음 동료들과 함께 체포된다. 감옥에서 모드는 단식투쟁에 들어가고 강제급식을 당한다.

 서프라젯은 대중의 관심을 끌기 위해 투쟁의 강도를 높여야 된다고 생각한다. 국왕 조지 5세가 참가하는 더비 경마에 가서 깃발을 들어 대중의 이목을 끌 계획이었다. 그러나 당일 모드와 에밀리 데이비슨만 나타난다. 국왕 근처에 접근하지 못하자, 에밀리는 혼자서라도 강행하겠다고 나선다. 경마가 진행되는 중에 에밀리는 트랙에 나서고 모드는 에밀리가 말에 치여 쓰러지는 것을 목격한다. 모드와 동료들은 에밀리의 장례식에 참석한다.

 엔딩에서 1918년 여성투표권이 부분적으로 주어졌다는 자막이 나온다. 그리고 나라별로 여성투표권이 주어진 리스트가 이어진다.

* * *

 <서프라젯>을 넘어서, <서프라젯> 속으로

 영화는 영화일 뿐, 역사 그 자체는 아니다. 그리고 100분의 러닝타임에 역사의 모든 내용을 담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정치적 감상은 시공간적 제약으로 제대로 표현되지 못한 영화의 역사적 배경과 정치적 맥락에 주목함으로써, 영화가 다루는 운동과 투쟁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킨다. 영화가 충분히 다루지 못한 세프라젯 운동의 정치와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보자.

 

 서프라젯과 서프라지스트: 주류와 비주류

 먼저, 서프라젯은 경멸적인 표현이다. 세칭 신사의 나라에서 여성들, 특히 특권층과 고위층 여성들이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고 공공연히 폭력과 테러 등의 범죄(?)를 저질렀다. 당시 주류언론은 여성 선거권운동가를 부르는 용어인 서프라지스트(suffragist)와 구별해 축소형어미(ette)를 붙여 서프라젯(suffragette)이라고 불렀다.

 서프라젯이란 단어는 폭력적 테러를 서슴지 않는 급진적 여성활동가들에 대한 경멸과 비하를 담고 있다. 서프라지스트가 최소한 중립적 표현으로서 여성선거권 활동가 일반을 가리키는 데 비해, 서프라젯은 주류인 서프라지스트의 아류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서프라젯이란 용어에는 정치사회적으로 비주류/아류를 배제하려는 주류언론의 편견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조직과 운동: NUWSS 대 WPSU

 다음으로, 영화가 제대로 다루지 않는 것은 당시 여성선거권운동의 정치적 지형이다. 영화에 서 서프라젯의 핵심조직인 여성정치사회연합(WPSU: Women's Political and Social Union)이 등장하지만, 당시 여성투표권운동의 주류조직은 전국여성투표권단체연합(NUWSS: National Union of Women's Suffrage Societies)이다.

 1897년 여성투표권 단체들의 통합으로 결성된 연합은 여성운동과 투표권 운동의 중심적 단체로서, 밀리센트 포셋(Millicent Fawcett)이 이끌었다. 서프라젯의 전투성을 거부한 연합은 평화적, 합법적 수단을 통한 선거권 쟁취를 목적으로 했다. 그 결과 의회에서 법안통과를 위한 활동과 로비가 중심이었다.

 이 주류조직은 1910년 전국에 500개 지부, 100,000명 이상의 회원을 가졌고, 회원의 대부분은 중산층 여성들이었다. 여성정치사회연합과 달리, 남성도 회원으로 받아들였다. 1906년 총선에서는 여성투표권을 찬성하는 후보를 지지하는 운동을 벌였고, 1907년 2월에는 최초의 야외행진(Mud March)을 벌이기도 했다. (아마 서프라젯에 대한 경쟁심으로)

 전쟁 후인 1919년 연합은 전국평등시민권단체연합(National Union of Societies for Equal Citizenship)으로 이름을 바꿨고 투표권 남녀평등을 위해 활동했다. 선거권 남녀평등이 이뤄진 1928년 이후에는 교육과 복지의 양성평등을 위한 활동으로 전환했다.

 

 서프라젯: 여성정치사회연합(1903-1917)

 반면 여성정치사회연합(1903-1917)은 1903년 맨체스터에서 설립되었다. 주류(NUWSS)의 로비와 정치인 설득에 집중하는 합법적 투쟁방식에 반발한 비주류가 새로 세운 조직이었고, 에멀린 팽크허스트와 딸 크리스타벨이 주도했다. 여성만을 회원으로 받아들였고, 독립노동당(ILP)와 긴밀하게 협력했다.

 여성정치사회연합은 자백록 단체깃발을 만들었다. 자주색은 숭고한 피, 흰색은 순결, 녹색은 희망을 상징했다. 또 마르세이유를 개사한 “여성의 마르세이유”를 단가로 채택했고, 1911년에는 직접 작곡한 “여성의 행진”으로 단가를 바꿨다.

 조직 내에 여성출판사(Woman's Press)를 설립해, 선전과 재정사업을 총괄했다. 전국적으로 지부조직을 체인화해 팜플렛과 선전물을 판매했다. 연합은 기관지 <여성투표권>, <서프라젯>을 발행했다.

 조직의 정확한 규모는 알기 어렵지만, 1908년 6월에 런던 하이드파크에서 30만명의 군중이 참여하는 “여성의 일요일” 집회를 열기도 했다. 직접행동을 지향한 WPSU는 다양한 규모의 집회와 연설회, 여성의회 등을 열었고, 조직원들이 참여하는 여성캠프를 개최했다.

 

 서프라젯의 전투적 투쟁전술

 무엇보다도 서프라젯을 가장 유명하게 만든 것은 급진적 투쟁전술이었다. 법위반과 여성답지 않은(?) 폭력적 저항으로 악명(?)을 떨친 서프라젯은 대영제국 빅토리아 시대의 사회적, 도덕적 감수성의 위선을 적나라하게 폭로했다. 주류 여성운동과 제도정치의 합법주의를 거부했기 때문에, 세프라젯의 투쟁은 전술적 급진화를 통해 위선적 영국정치와 사회에 더욱 강력한 충격을 가하려고 했다.

 서프라젯의 전술적 전투성은 1905년과 1908년, 1913년 등 3단계에 걸쳐 투쟁의 강도를 높였다. 1905-07년의 첫 시기에는 시민불복종(Civil Disobedience) 전술을 구사했다.(이 용어가 국제적으로 운동권에서 사회화되기 훨씬 이전의 시기이다.) 주된 투쟁형태는 국회 앞 집단적 항의시위, 경찰과 몸싸움, 난간에 쇠사슬로 묶고 저항 등 비폭력 저항전술에 머물렀다.

 1908년에 시작되는 두 번째 시기는 공공시설에 대한 파괴전술이 채택되었다. 서프라젯은 공공건물과 고급상점의 유리창을 깨기 시작했다. 서프라젯은 시위 도중 경찰과 정치인에게 침을 뱉었고, 채찍이나 도끼로 정치인들을 공격하기도 했다. 1912년 7월 18일 메리 리차드슨은 허버트 헨리 애스퀴스 총리를 도끼로 공격했다.

 1913년부터 시작되는 세 번째 시기에는 방화와 폭탄테러가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세프라젯은 투쟁의 수위를 높였다. 우편함 불태우기, 전화선과 전보선 끊기, 빈 관저 방화와 공공건물 폭파 등 본격적인 테러전술(무정부주의운동의 사보타지전술)을 구사했다. 정부측의 피해집계에 따르면 1913년 서프라젯의 재산파괴 피해액은 54,000파운드에 이르렀다. 같은 해 1913년 에밀리 데이비슨은 국왕이 참석하는 경마더비를 방해하다가 사망해 서프라젯의 순교자가 되었다. 그녀의 장례식에 5만명이 참여해 애도했다.

 이 시기에 정부와 경찰의 체포와 탄압을 피해 서프라젯 지도부는 지하로 들어갔고, 크리스타벨 팽크허스트는 파리에 망명한 상태에서 조직을 지도했다. 서프라젯은 짓수 무술을 연마한 보디가드팀을 구성해 경찰의 감시를 피해 다니는 지도부를 보호하기도 했다.

 

 감옥내 투쟁: 단식과 강제급식

 시위와 회의방해로 체포된 서프라젯은 정치범 대우를 요구하면서 감옥 내에서도 전투적 투쟁을 벌였다. 1909년 6월 마리온 월러스-던롭은 12년 재물손괴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그녀는 벌금형을 거부하고 1개월 징역형을 선택했다. 그리고 7월 5월 정치범 대우를 요구하며 처음으로 단식에 들어갔다. 서프라젯 최초의 단식투쟁이었다.

 이후 서프라젯의 단식투쟁은 핵심 투쟁전략이 됐다. 에멀린 팽크허스트는 18개월 동안 10차례나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서프라젯의 저항과 단식투쟁에 놀란 교도당국은 처음에 이들을 석방했다. 그러나 체포를 두려워하지 않는 서프라젯 여성들이 연이어 단식에 돌입하고 심지어 물까지 거부하자, 코를 통해 삽관해 음식물을 주입하는 강제급식을 시작했다.

 서프라젯의 단식과 교도당국의 비인간적 처우는 커다란 사회적 이슈가 되었다. 1913년에는 의회도 상황의 심각성을 고려해 재소자 건강상 일시석방법(일명 고양이와 쥐법)을 제정했다. 단식으로 재소자의 건강이 심각하면 일시적으로 석방했다가 건강이 회복되면 다시 구금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프라젯의 단식투쟁은 계속됐다. 1913년 방화투쟁을 주도한 키티 메리언의 경우 체포된 다음 강제급식과 석방을 되풀이했고, 강제급식 당한 회수가 200번이었다.

 

 팽크허스트 가문의 여성들

 서프라젯조직의 핵심은 팽크허스트 가문의 여성들이었다. 어머니인 에멀린은 조직의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였고, 장녀 크리스타벨, 차녀 실비아, 막내 아델라도 조직에 참여했다. 크리스타벨은 실질적 조직의 운영자로서 막강한 권한을 휘둘렀다.

 어머니인 에멀린 팽크허스트(1858–1928)는 서프라젯운동의 창시자이자 상징이었다. 뛰어난 연설로 청중을 사로잡았고, 18번이나 구속된 서프라젯 운동의 절대적 지도자였다. 장녀인 크리스타벨 팽크허스트(1880–1958)은 조직의 실질적 지도자로서 운동과 조직 전반을 총괄했다. 실비아 팽크허스트(1882–1960)는 역시 조직의 핵심 지도자였고, 특히 노동운동과 좌파운동에 참여했다. 막내인 아델라 팽크허스트(886–1961)도 오스트레일리아로 이주해 서프라젯 운동을 이끌었다.

 그러나 팽크허스트 가문의 여성들은 조직의 권한을 집중시켜 독선적인 결정을 내리고 독단적으로 조직을 운영한다는 조직 내외의 비판을 받았다. 에멀린은 “무자비한 독재자”란 비난을 받았고, 크라스타벨도 “전제군주”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자신의 결정에 반대하는 회원들을 가차없이 제명했다.

 그 결과 1907년과 1912년, 1914년에 조직이 분열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1907년에는 연합이 노동당을 포함한 모든 정당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자, 일부 지도부가 이탈해 여성자유연맹(Women's Freedom League)을 결성했다. 1912년에는 창립회원이자 기관지 편집자였던 프레더릭과 에멀린 페틱 로렌스 부부를 제명했다. 그리고 1914년에는 이스트엔드연맹(East End Federation)을 이끌면서 노동운동에 관여한 실비아 팽크허스트까지 제명했다.

 

 서프라젯과 노동운동

 서프라젯 운동은 당시의 노동운동과 긴밀한 연관을 가지고 전개되었다. 에멀린의 남편인 리차드 팽크허스트(1935-1898)가 독립노동당(ILP)의 지도적 사회주의자였기 때문에, 팽크허스트 가문의 여성들은 당시 영국 노동운동과 좌파운동을 배경으로 서프라젯 운동의 전면에 나섰다.

 일화에 의하면 에멀린 팽크허스트가 여성정치사회연합을 결성하게 된 하나의 계기는 맨체스터의 독립노동당이 여성의 출입을 제한하는 조치에 대한 분노였다. 여성의 권리를 위해 투쟁한 남편의 유지를 무시한 남성 지도자들의 완고한 독선이 가장 전투적인 여성선거권 운동을 탄생시켰다.

 그러나 서프라젯은 남성 투표권이 전체 남성의 1/3에 머문 시점에 여성선거권을 핵심요구로 내건 여성들만의 조직이었다. 그 결과 여성선거권을 지지하지만, 모든 남성의 투표권을 우선시해 보통선거권을 요구한 노동당과도 결별하게 됐다.

 세프라젯이나 WSPU의 지도부는 대부분은 중산층 여성이었다. 그러나 당시 성장하고 있던 노동조합운동의 활성화와 함께 여성 노동자들이 서프라젯에 합류했다. 나중에 영국의 대표적 극좌파 지도자가 된 실비아 팽크허스트는 에멀린이나 크리스타벨과 달리, 여성운동과 노동운동의 결합을 추구했고, 결국 이런 의견차이 때문에 조직에서 제명당했다.

 서프라젯 중에는 애니 케니(1879-1953)가 대표적인 여성노동자 출신 활동가였다. 케니는 중상류층 여성들이 주도적 역할을 한 조직 내에서 크리스타벨 팽크허스트의 핵심측근으로서 지도부에 합류했다. 특히 크리스타벨이 경찰의 탄압을 피해 프랑스 파리로 망명한 1912-13년에는 매주 파리와 런던을 오가면서 크리스타벨의 지시를 조직에 전달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서프라젯과 1차대전: 서프라젯의 한계

 1914년 일어난 1차 세계대전은 서프라젯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파리에 망명 중이던 크리타벨 팽크허스트는 내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활동중단을 주장했다. 전쟁이 일어난 만큼 여성들이 영국정부를 지지해야 한다는 민족주의적 입장으로 선회했다. 연합은 기관지 <서프라젯> 발행을 중단하고, 대신에 1915년 4월 <브리타니아>라는 새 잡지를 발행했다.

 회원의 다수는 전쟁을 지지한 반면, 전쟁에 반대하는 이들은 연합에서 탈퇴해 새로운 조직(Suffragettes of the Women's Social Political Union [SWSPU] and the Independent Women's Social and Political Union [IWSPU])을 결성했다. 전쟁 와중에 투쟁을 접으면서 대중의 관심이 시들해지자 1917년 연합은 조용히 해산했다. 1918년 여성선거권이 부분적으로 보장되자 크리스타벨과 에멀린 팽크허스트는 의회진출을 위해 여성당(Women's Party)를 결성했다.

 말년에 에멀린 팽크허스트는 러시아 볼셰비키의 위험을 이유로 보수당에 가입했고, 1927년 보수당 후보로 선거에 출마하기도 했다. 21세 이상의 모든 여성에게 선거권이 부여되기 몇 주 전인 1928년 6월 14일 에멀린 팽크허스트는 69년의 삶을 마감했다.

 

 마치며: 영화와 운동

 <서프라젯>(감독: 사라 개브런)은 서프라젯 운동의 역사를 충실히 반영한 구성으로 작품의 완성도를 높였다. 서프라젯의 시위, 남성경찰의 잔인한 무차별 폭력, 정치인들의 위선, 단식투쟁과 강제급식, 방화와 폭탄테러 등 서프라젯 운동의 역사에서 일어난 주요한 투쟁을 담담하게 재현했다.

 특히 모드 워츠란 가상의 여성 노동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20세기 초 영국의 상황에서 여성노동자와 서프라젯 활동가들이 견뎌야 했던 삶과 투쟁을 다룬 것은 주목할 만한 성과이다. 감독의 제작일기에 따르면, 원래 주인공은 중산층 여성이었지만(이는 서프라젯 지도부 대부분이 중산층인 사실과 부합한다) 노동계급 여성으로 바꿔 새로운 접근을 모색했다.

 영화의 클라이막스를 장식하는 장면은 서프라젯의 순교자 에밀리 데이비슨의 액션인데, 이는 모두 픽션이다. 영화에서는 조직의 기획인 것처럼 묘사되고, 우연적 요인으로 모드가 에밀리 순교의 유일한 목격자가 되는데, 이러한 모드와의 공모는 영화적 상상이다. 에밀리 데이비슨은 조직에서 떨어져 나와 개인적 행동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프라젯>은 대중영화로서 드물게, 악명높은 급진적 여성운동을 정면으로 다뤘다. 물론, 서프라젯 운동의 역사를 시공간적으로 제한된 화면에 모두 담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간략하게 살펴본 서프라젯 운동과 비교하면, 영화가 서프라젯 운동과 거기에 참여한 활동가들의 삶과 투쟁을 비교적 충실하게 재현해 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여성노동자의 의식화와 투쟁, 그 과정에서 겪게 되는 고통과 분노, 조직과 운동 속에서 나타나는 동지애와 갈등 등 스크린을 통해 표현된 여러 주제들은 100년 전 여성 투사들의 옛날 이야기만은 아니다.